[인터뷰 김영래 대한농산RPC 대표]“고달픈 사람 희망 주는 ‘생명 쌀’ 공급하고파”
[인터뷰 김영래 대한농산RPC 대표]“고달픈 사람 희망 주는 ‘생명 쌀’ 공급하고파”
  •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
  • 승인 2019.04.23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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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기를 밥 먹듯 하던 여섯 살 소년 ‘쌀집 주인’으로
주위에 ‘배곯는 사람 없기를’ 꿈꾸며 30년 봉사
공장부지 휴양소 조성…아픈 사람에 무료 개방
세 번 쓸 것 두 번 아껴 어려운 사람에 베풀어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어린 시절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소년이 ‘쌀집 주인’이 됐다. 벼가 도정기에 들어가 하얀 쌀이 되어 쏟아지는 모습만 봐도 행복했던 청년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 쌀이 주는 뿌듯한 포만감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있다.

옛말에 ‘정미소 집 아들’ 하면 부잣집으로 통했다지만 어디에나 꼭 예외는 있는 법이다.

“태어날 때부터 집이 가난했어요. 아버지가 정미소를 동업으로 운영했지만 적자를 면하는 날이 없어 부도나기 직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내려왔어요.”

김영래 대한농산RPC(미곡종합처리장) 대표는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 삼성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때는 1985년. 그로부터 34년 정미업 외길을 걸으며 주위에 ‘배곯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해 기부와 봉사활동을 수시로 진행하고 있다. 사회복지시설에 쌀 기부뿐 아니라 수원지방검찰청 법사랑위원회 회장으로 소년소녀 멘토링과 한가정 지원, 학교폭력 예방, 예능특별활동 지원 등 봉사활동을 20년 넘게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김영래 대한농산RPC 대표.
김영래 대한농산RPC 대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것 같다.

그 시절엔 다들 어렵긴 했지만 우리집은 특히 가난해 배곯기를 밥 먹 듯 했다. 배고픔을 참기 힘들었다. 배가 고파 담벼락에 기대 있으면 밥 한숟갈 떠 주는 이웃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때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 돈을 벌면 내가 두 번 쓸 것 한번만 쓰고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 돕자고, 아프면 약값이라도 보태주자고…

-실제로 주위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계신다.

나도 가끔은 억울한 일 당하고 벼라별 일 다 겪는다. 그럴 때 분통함 억울함을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데서 오는 보람으로 이겨내고 있으니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고 있다. 누구한테 해코지 한 적 없고 내 자신이 떳떳하니 한번도 불안하게 자 본 적이 없다. 아픈 사람, 어려운 사람 도와주겠다고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다. 그 꿈을 이뤘으니 오히려 감사하다. 독거노인 돌보고 요양원 목욕봉사하고 무료급식 배식하고, 기부하고 베풀면 신이 난다.

-RPC 건물도 봉사정신에서 설계한 것이라 예사롭지 않다.

창고 지으려고 매입한 농가를 리모델링해 불 떼는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아픈 사람 돈 걱정 없이 쉬었다 가라고, 그래서 얼마간 위안이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공장 주위에 1000평 잔디를 심어 바위도 놓고 나무도 심고 연못도 가꿨다. 24시간 1년 365일 누구에게나 개방하고 있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아버지 일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하시던 정미소가 만날 적자를 봐 인건비라도 줄이자는 생각에 내려왔다. 가을이면 밤새도록 벼 말리고 방아 찧느라 잠을 못 잤다. 너무 고단했지만 수익은 턱없이 적어 8년 후 정부 융자 받고 빚을 내 독립 했다. 1995년 화홍통합정미소를 지어 옮겼는데, 운이 좋아 4~5년 장사가 잘돼 DSC(벼 건조저장 시설)를 RPC로 키우고 점차 넓혀 나갔다. 그해 도정설비를 다 갖추고 이름을 대한농산으로 변경했다. 처음 시작할 때 2000평 부지가 지금은 2만평으로 늘었고 한 개도 없던 창고가 2000평이 생겼다. 벼를 저장하는 사이로(SILO)도 10기로 벼 5000톤을 보관할 수 있다.

-사업상 어려움은 무엇인가. 하고픈 말씀.

쌀 시장이 계속 축소되고 있어 안타깝다. 국민 한 사람이 1년 동안 쌀 한 가마도 안 먹으니 문 닫는 RPC들도 많고… RPC들이 경영여건이 좋아져 농민 민원 해결에 더욱 일조할 수 있도록 쌀 산업이 활성화됐으면 좋겠다. 또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정직하게 시세를 주고 벼를 샀는데 ‘도둑놈’ 취급당할 때 속상하다. 내가 시장에 팔 수 있는 단가로 매입한 건데 1~2000원 더 얹어주는 곳과 단순 비교하니 괜히 죄 지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노숙자든 국회의원이든 생명의 존엄성은 같다. 그 생명에 직결되는 쌀이 한끼 식량뿐 아니라 힘든 사람이 희망을 갖고 다시한번 세상에 도전할 용기를 주는, 그런 쌀을 공급하고 싶다.

------------------------------------------------------------------[탐방] 대한농산RPC

 

창고 하나 없던 작은 공장이 10배로 ‘쑥’

증축·확장 거듭…5천톤 용량 사이로 10기 운영

기숙사·체력단련시설 설치, 직원복지에도 신경

경기 화성시 송산면에 위치한 대한농산 미곡종합처리장(RPC)은 2만평 부지에 2000평 규모의 창고와 5000톤 용량의 사이로 10기를 14명의 직원이 알뜰하게 관리하는 내실있는 회사다. 아버지 밑에서 정미업을 배우던 김영래 대표가 26년 전 조그만 공장을 인수해 이만큼 불려 왔다.

대한농산RPC 전경.
대한농산RPC 전경.

대한농산의 직접적인 토대가 생긴 것은 1995년 화성에 조그만 공장을 설립하고부터다. 그 이후 4년 동안 영업이 활발해 사업확장을 한 것이 오늘날 대한농산을 이끈 밑거름이 되었다.

김 대표는 정부 융자와 사채 빚을 내 창고 하나 없던 조그만 정미소를 사들인 후 본격적으로 정미업에 뛰어들었다. 그간 아버지 밑에서 익힌 노하우와 성실성 때문인지 사업이 잘돼 공장 증축을 거듭하고 창고며 도정설비를 차츰 갖추어 나가 10배 규모로 키웠다.

대한농산RPC 전경.
대한농산RPC 전경.

 

김영래 대표는 공장부지 1000평에 잔디를 두르고 농가를 리모델링해 만든 온돌방을 심신이 지친 이들에게 무료로 내어주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 도움을 받은 것처럼 어려운 사람에게 꼭 베풀 것이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김영래 대표는 공장부지 1000평에 잔디를 두르고 농가를 리모델링해 만든 온돌방을 심신이 지친 이들에게 무료로 내어주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 도움을 받은 것처럼 어려운 사람에게 꼭 베풀 것이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대한농산 공장 부지는 다른 RPC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도정을 하고 쌀을 포장하는 공장이야 다를 게 없지만 공장 인근 주변 부지는 마치 휴양소처럼 꾸며 놨다. 1000평을 잔디밭으로 둘러 나무와 꽃을 심고 연못을 만들었다. 군데군데 들어선 주택은 온돌이 놓인 황토방이다. 사업이 안정을 찾을 즈음, 어린 시절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김 대표가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가난해서 밥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어린 시절에 가끔 도와주는 이웃에게 고마움이 사무쳐 ‘나도 크면 내 것 세 개 중 두 개는 남에게 베풀 것’이라고 자신과 약속했다는 것이다. 황토방은 창고를 지으려 매입한 농가를 리모델링해 환자가 머물도록 했다. 힘든 사람, 아픈 사람, 고달픈 사람이 쉬어갈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한단다.

그래서 주위에 김 대표의 도움을 얻은 사람도 수두룩하다. 가망 없는 큰 병을 고친 사례도 세 번이나 목격했다. “사람이 희망을 가지면 살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요. 지금 힘든 사람에게 내 작은 도움이 용기를 준다면 그것보다 큰 보람은 없어요.”

직원 복지에도 신경 써 집이 먼 직원들을 위해 기숙사를 짓고 부지 한 켠에 탁구대 등 운동기구를 갖춘 체력단련시설을 지어 여가를 활용하도록 했다.

대한농산은 화성시와 화성시 공동브랜드 수향미(품종: 골드퀸3호)를 지역 RPC들과 분담해 총 2만4000톤을 계약 재배한다.

수향미는 밥을 짓기도 전에 구수한 누룽지향이 온 집안에 퍼지는 쌀로 유명하다. 국내 육성품종으로 향(香)으로 특허를 받았다. 혈당 상승의 원인이 되는 아밀로스 함량이 적어 혈당관리에 유리하며 찰기가 좋고 24시간 식감이 유지되는 것이 특징이다. 소화율이 뛰어나 아기 이유식 재료로 종종 쓰인다. 이밖에 경기미 ‘햇살드리’(고시히카리), 저공해 청결미, 뉴라이스 등을 판매한다.

김영래 대표는 “한 줌 쌀이 생명을 살리듯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한 마디 말이, 몇 푼의 돈이 세상에 다시 나설 자양분이 될 수 있다. 계속 베풀며 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