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치 재무제표 내라"…알피시들 ‘뚜껑’ 열렸다
"5년치 재무제표 내라"…알피시들 ‘뚜껑’ 열렸다
  •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
  • 승인 2019.06.07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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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건전성·분식회계 본다며 업체들에 제출 요구
아무런 정책적 효과 없어…명백한 경영권 침해
‘벼 매입자금 25%’ 운영자금 확보방안 제출 요구도
“농식품부 검찰·사정기관인가?” 업계 원성 들끓어

오만가지 서류 제출 요구에 알피시 업자들 분노

20년 관행 따랐을 뿐인데 ‘사기죄’ 운운, 범죄자 취급

지난 4년 쌀값 폭락으로 엄청난 손실은 일언반구 없어

제출 서류 흠 없어야 올해 벼 매입자금 배정…날벼락

"돈 빌려 쓴다고 알피시를 '예산도둑'으로 본다" 업계 한숨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정부가 미곡종합처리장(RPC) 업체들에게 분식회계 여부를 가리기 위한 5년치 재무제표를 제출하라고 통보해 논란이 일고 있다.

분식회계는 회사의 실적을 좋게 보이기 위해 회사 자산이나 이익을 회계처리 기준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처리해 재무제표를 만드는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 주무부서는 지난달 31일 2018 RPC 쌀산업 기여도평가 결과에 대한 설명회에서 “너무 많은 알피시가 분식회계를 한다”며 “5억원 이상 특가법 적용을 받는 사기죄에 해당하고 수사대상과 처벌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산지 쌀 유통의 구심체 역할을 하는 알피시들은 정부가 배정한 벼 매입자금을 1년 단위로 은행에서 대출받아 벼를 사왔다. 이전에 대출받은 금액을 다음에 받은 대출금으로 갚는 대환대출로 20여년간 지내왔기 때문에 해당 대출금을 단기가 아닌 장기 차입금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분식회계에 해당해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법적 잣대를 들이대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업계는 농식품부가 정책적 효과가 전혀 없는 쓰잘데 없는 일을 알피시에게 시키면서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왜냐면 설사 알피시들이 단기 차입금을 장기로 기재했다고 해서 어떤 개인에게 손해를 미치거나 산업에 악영향을 주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피시들의 역할은 수확기 벼 매입을 통해 농가들의 소득을 보전하는 것이다. 그 역할을 잘 하라고 정부가 지금껏 저리로 벼 매입자금을 지원해 왔다. 즉, 재무제표 제출은 알피시 운영목적과 관계가 없는 불필요한 행정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이런 반발은 전산처리 시스템이 상대적으로 덜 돼 있는 민간알피시 쪽에서 거세다. 20년 동안 아무런 말도 없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잘못은 고쳐야 하는 게 맞지만 계속 대환을 하면서 장기부채로 무심코 기재한 경우인데, 이게 진짜 중요한 잘못인지 모르겠다”며 “정부도 20년 동안 방치한 셈이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농식품부는 분식회계가 확인됐을 때 2019년 벼 매입자금 배정에서 제외한다고 공표했다.

농식품부는 말 한마디면 되지만 업체로서는 준비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다. 그런 정책 추진 과정에서 사전준비도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민간 등 일선 알피시 업계에 따르면, 농협 단독 알피시의 경우에는 농협 본소에서 대출자금을 관리하는데, 이 역시 분식회계에 해당한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본지가 회계사무소에 문의한 결과 “본점이든 지점이든 같은 농협이기 때문에 분식회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다. 업체들에 큰 부담을 주는 정책집행 이전에 사전 조사를 면밀히 거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운영자금 확보방안 못내면 '퇴출' 공산 커

농식품부는 알피시 업체들에게 느닷없이 ‘운영자금 확보방안’을 제출하라고 했다. 재무건전성을 확인한다며 재무제표와 함께 7일까지 농협중앙회나 소속협회를 통해 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알피시들은 벼 매입자금으로 배정받은 금액의 25%에 해당하는 운영자금 확보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50억원을 배정받았다면 4분의 1에 해당하는 12억5000만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계획을 세워 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알피시들이 대출로 연명해 오는 상황을 감안하면 적자가 크거나 수년간 적자 상태를 끌어온 업체는 이번 배정에서 제외될 뿐 아니라 알피시에서 퇴출당할 공산이 크다.

주무부서는 단지 '현황 조사'라고 설명했지만 배포한 자료에는 ‘운영자금 미확보, 분식회계에 해당하지 않는 업체부터 대출 실행하라고 은행에 통보하겠다’고 적시돼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도 채권을 가진 은행이 만기 연장을 조건으로 자구책을 요구하고 자구책이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을 때 기업이 부도나는 수순을 거친다.

업계에선 원성이 하늘을 뚫을 기세다. 무엇보다도 재무건전성을 본다며 재무제표와 분식회계를 운운하는 것은 엄연한 ‘경영권 침해’라는 지적이다. 운영자금이 부족하든 적자가 나든 경영자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지, 정부가 걸고넘어질 성격은 아니라는 것이다. 농협 내 하나의 사업인 셈인 농협알피시는 덜하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민간알피시는 부도의 위험을 운영자가 감수하지 정부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런 반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괜한 일을 시켜서 서류를 계속 준비하고 있다”며 “다른 방법이 없다. 벼 매입자금 대출을 적게 받든가 남의 돈을 끌어다가 자본금을 충당하든가 둘 중 하나다”고 말했다.

운영자금 비율로 정해진 25%의 근거도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명분 없이 자의적인 토대로 경영권에 간섭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업계는 그간 산지 쌀 유통의 구심체로서 역할을 다한 것에 대한 결과가 이거냐며 허탈해 하고 있다. 일각에선 대출상환 기한 10개월 단축을 미끼로 업체들에게 2개월 자금 융통 길을 마련해 주면서 다른 것들로 더 옥죄는 형국인 ‘조삼모사’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4년 동안 쌀값이 폭락해 알피시들이 손해를 본 뒤라 배신감마저 토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설령 벼 매입자금을 20억원을 배정해 줬더라도 개인이 담보능력이 없으면 대출을 1원도 못받는다. 정부는 저리로 자금을 빌려쓰게끔 지원해줄 뿐이지 알피시 운영은 개인이 이끌어 왔다”며 “박근혜 정부 때 3년 이상 엄청난 역계절 진폭으로 큰 손해를 본 것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고 재무제표를 내라는데, 알피시 주무부서는 자기들의 정체성이 무슨 검찰이나 사정기관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관계자는 “정부가 알피시 업자들을 범죄자 취급하고 있다”며 “정부 예산을 거저 가져다 쓰는 것도 아닌데 알피시를 ‘예산 도둑’으로 몰고 있다”고 항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