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미(米) 도정 놓고 방앗간들 10년 묵은 갈등
나랏미(米) 도정 놓고 방앗간들 10년 묵은 갈등
  •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
  • 승인 2019.10.16 22: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설 다 갖췄는데" 미곡종합처리장엔 그림의 떡
100년 동안 변화 없는 정부미 관리체계...원성 높아
수요처 적기 공급, 조작비 절감 이유 대지만
쌀 가공능력 월등해진 현장에선 "설득력 떨어진다"

연이은 태풍으로 도정수율 급감 예상

벼 사서 쌀로 파는 RPC들 내년도 '경영난' 걱정

"산물벼 만이라도 도정허용" 요구 어느 때보다 높아

정부미 필요한 지역 RPC가 도정...수요처 신속 공급

정부양곡 도정공장까지 옮기느라 들이는 예산 대폭 절감

47가지 항목 경영평가 매해 받고 각종 규제에 "못해먹겠다"

150개였던 민간RPC, 지금은 67개...채찍 만큼 당근도 줘야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방앗간 업계에 파벌이 갈려 10년 동안 갈등을 이어오고 있지만 앞으로도 간극을 좁히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갈등 해소의 '키'를 쥐고 있는 정부가 나설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15일 농가와 산지 쌀 유통업계 등에 따르면 미곡종합처리장(RPC)은 RPC에 '산물벼 도정'을 허용해 줄 것을 여느 때보다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2019년산 쌀을 팔아야 하는 내년 경영상황이 올해처럼 어려울 것이 예상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수확기 직전 연이은 태풍으로 도정수율은 떨어지게 돼 있다. 당연 벼로 사서 쌀로 파는 RPC들은 줄어든 중량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올해처럼 쌀값이 계속 떨어지고 쌀 판매가 잘 안 되기라도 한다면 RPC들은 3중고(苦)에 허리가 휘게된다.

한 RPC 공장에 톤백벼를 트럭으로 나르고 있다.
한 RPC 공장에 톤백벼를 트럭으로 나르고 있다.[사진=유은영 기자]

 

◆방앗간도 여러 종류...헛갈리네

벼를 쌀로 도정하는 방앗간은 전국에 약 300여개가 있다. 하는 일은 같지만 취급하는 벼가 달라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갈등의 중심에 '정부양곡'이 있다.

우선 방앗간은 크게 RPC로 불리는 미곡종합처리장과 정부양곡 도정공장, 임도정공장 등 3 종류로 나뉜다. RPC는 매해 수확기에 정부 비축미 중 산물벼를 농가로부터 사들이는 방앗간이다. 정부양곡 도정공장은 말 그대로 정부가 갖고 있는 나랏미를 도정하는 곳이다. 임도정공장은 민간을 상대로 벼를 도정해 파는 개인 정미소로 보면 된다.

갈등은 RPC와 정부미 도정공장 사이에서 일어난다. 정부를 대신해 공공비축 산물벼를 매입한 RPC에 자체 도정시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정부미 도정공장에만 나랏미 도정을 맡기기 때문이다. 농가로부터 물벼를 사들여 말려 정부에 돌려주느라 수고와 비용을 감당한 RPC로선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RPC가 설립된 1992년 이후에도 여전히 정부미 도정공장에만 나랏미 가공을 맡기는 것은 특혜"라며 "시대가 변했으면 정부양곡 관리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정부양곡 도정 절차. 농가로부터 정부비축 산물벼를 수매한 RPC에서 정부창고로 옮긴다음 정부양곡 도정공장으로 또 옮겨 도정한 후 수요지에 공급하기까지 총 8단계를 거쳐야 한다.
현행 정부양곡 도정 절차. 농가로부터 정부비축 산물벼를 수매한 RPC에서 정부창고로 옮긴다음 정부양곡 도정공장으로 또 옮겨 도정한 후 수요지에 공급하기까지 총 8단계를 거쳐야 한다.
산물벼를 RPC에서 직접 도정해 수요지에 공급할 경우 창고와 정부양곡 도정공장으로 옮기는 이송비가 대폭 줄어 약 50억원의 정부예산을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물벼를 RPC에서 직접 도정해 수요지에 공급할 경우 창고와 정부양곡 도정공장으로 옮기는 이송비가 대폭 줄어 약 50억원의 정부예산을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PC '산물벼 도정' 허용하면 '일석삼조'

RPC에 정부비축 산물벼 도정을 허용하면 RPC 각 업체당 약 7000만원의 조수익을 올려 경영개선에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RPC의 경영개선이 불러오는 파급효과가 더 크다.

일단 경영이 나아진 RPC는 산물벼 수매를 늘릴 것이고 이로 인해 농가들이 건조벼를 수매장에 내느라 벼를 말리고 포장하고 무게를 재고 하는 수고가 덜어진다.

또 군.관 급식용이나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줄 쌀을 도정하려고 RPC에서 벼를 날라 정부미 도정공장으로 운송할 필요가 없어져 정부재정도 절감된다. 한국RPC협회의 연구용역 결과 예산 절감액이 약 5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온 바 있다.

실수요자가 있는 지역의 RPC에서 정부미를 도정하게 되므로 신속한 공급이 가능해져 행정비용도 절약된다.

그러나 정부는 정부양곡 도정공장을 지정한 목적이 '정부미를 도정하는 데 있다'는 이유를 들어 RPC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엄밀히는 공개입찰 부쳐야

RPC가 사실상 요구하는 것은 '정부양곡 도정의 공개입찰'이다. 도정시설을 갖춘 같은 방앗간이고 오히려 정부미 도정공장보다 RPC쪽이 시설이 훨씬 좋은데 거의 100년 동안 한 곳과 수의계약을 거듭하며 가공권을 주는 것은 특혜라는 지적이다.

정부미 도정공장은 일제가 우리나라 쌀을 수탈하기 위해 인천, 부산, 군산, 목포 등 항만에 있는 크고 좋은 개인 정미소를 '영단 방앗간'이라는 이름을 주어 농가로부터 빼앗은 정부양곡을 관리하게 한 것이 시초다. 이들 방앗간은 대부분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를 이어왔으며 이름만 정부양곡 도정공장으로 바뀐 채 운영되고 있다.

RPC 업계에 따르면 정부양곡 가공을 공개경쟁 입찰 방식으로 개선했을 때 정부가 얻을 수 있는 가공료 절감액이 연간 약 200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정부는 ▲정부미의 적기 공급과 ▲조작비 절감 등 이유를 들어 이를 허용치 않고 있다.

한때 7개 시.도에서 공개경쟁입찰 방식을 시범 실시한 결과 오히려 가공료 등 비용이 증가했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이같은 정부측 입장에 대해 RPC도 할 말이 많다. 우선 RPC에 도정을 맡겨도 정부미의 적기 공급에는 하등의 차질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16년 정부양곡 도정공장의 가공능력이 연 164만3000톤이었던 반면에 RPC의 가공능력은 311만톤으로 두 배가량 높았다.

게다가 2000년 실시한 시험 공개경쟁입찰은 입찰 참가자격을 정부양곡 도정공장으로 국한시켰다는 '함정'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RPC 관계자는 "우리나라 쌀 가공능력은 쌀 생산량 대비 약 7~8배에 달해 어떤 방앗간에서 가공해도 정부미의 안정적인 공급에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바껴야 할 것은 '수의계약' 방식

정부미 도정공장이 정부미를 도정하는 것을 놓고 RPC가 '특혜행정'이라고 비판하는 데에는 '수의계약' 이라는 낡은 계약방식이 존재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3년 주기로 정부미 도정공장들과 독점적 가공도급계약을 맺어 왔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한 계약이 갱신되면서 계속 유지돼 온 것이다.

반면 RPC들은 매년 경영평가를 받는데 평가항목이 47개에 달한다. 오.탈자 하나에도 감점을 주고 신청서류 접수시간을 1분이라도 넘기면 받지 않는 등 절차가 까다로워 형평성 시비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2년 전부터는 평가 이름이 '쌀산업 기여도 평가'로 바뀌며 평가 대상 RPC가 위치한 지자체의 타작물 재배 성과까지 점수를 매겨 원성이 극에 달한 상태다.

규정 강화와 잇따른 경영난에 RPC 수는 초기 150곳에서 현재 67개로 거의 3등분이 났다.

업계 관계자는 "RPC는 수확기에 벼를 매입해 농가소득 안정에 기여해 왔음은 물론 최근 수년간 계속된 쌀값 하락으로 벼를 산 값보다 쌀로 판 가격이 낮아 손해를 보면서도 정부정책에 순응해 왔다"며 "정부양곡 도정의 공개입찰 전환이 당장 힘들면 산물벼만이라도 RPC가 도정하게끔 허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