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계가 일하는데…양곡관리사로 고용창출 못해
온도계가 일하는데…양곡관리사로 고용창출 못해
  •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
  • 승인 2019.12.1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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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에 온도계, RPC엔 ‘곡립판정기’ 사람 할 일 없어
수십년 경력 기존 직원과도 충돌 불가피, 결국 사라질 것

(사)대한곡물협회 주관 시험절차상 신뢰성 확보 문제 제기도

한국RPC협회 등 관련단체들도 시험 출제 참여시켜야

"공문 한 번 못 받아봤다" 항의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정부가 도입한 양곡관리사가 당초 목표한 일자리창출 효과도 없을 것으로 나타나 ‘무용론’에 기름을 부을 전망이다.

16일 정부양곡 창고업계 및 미곡종합처리장(RPC) 업계에 따르면 오는 21일 첫 자격증 시험에 업체 대표들이 응시한다.

이날 전북 및 충남의 민간RPC 업체들에 문의한 결과 대표 본인 또는 함께 일하고 있는 가족이 응시하는 경우가 100%에 가까웠다. 나머지는 응시원서 접수 시기를 놓쳐 다음 번 시험을 보는 업체들이 소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사람을 쓰느니 대표 자신이 자격증을 따 바뀌는 제도에 대비하겠다는 의미다.

양곡관리사 도입이 논의됐을 때부터 업계에선 불필요한 제도라고 입을 모았다. 정부양곡 관리체계 정립과 쌀 품질의 고급화 기반이라는 도입 목적 자체가 현장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가정주부들이 밥 할 수 있나 없나를 시험 보는 거랑 똑같아. 창고 온.습도만 보면 되는데 무슨 자격증이 필요해. 눈 감고도 창고 관리 다 하는데.”

한 RPC 업체 대표 ㄱ씨는 “70 다 돼 가는 사람이 수 십 년간 해 온 것을 책을 보고 외우려니 아주 지겹다”고 토로했다.

정부양곡 창고 또는 RPC 업주들은 개업과 동시에 사업 운영에 필요한 쌀 품질관리를 해 왔기 때문에 굳이 자격증을 따라는 것은 불필요한 규제라는 의미다.

사실 정부는 양곡관리사 자격증 소지자를 고용하라고 했지 대표 본인에게 취득을 강제하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애써 시험 준비에 나서는 건 비용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다.

ㄱ씨는 “창고만 들여다보면 되는 일에 사람을 쓸 수 없지 않겠느냐”며 “양곡관리사 업무가 관리감독하는 일이라 다른 직원과도 위화감이 생겨 본인도 견디기 힘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저온창고에 부착된 온.습도 기록계에서 특정 시간대의 온.습도 기록지를 뽑아내고 있다.
저온창고에 부착된 온.습도 기록계에서 특정 시간대의 온.습도 기록지를 뽑아내고 있다.
RPC의 곡립판정기(왼쪽)에 쌀알을 1000개가량 넣어 품위를 측정한 후 결과지를 출력한다. 해당 샘플은 완전립 84%다.
RPC의 곡립판정기(왼쪽)에 쌀알을 1000개가량 넣어 품위를 측정한 후 결과지를 출력한다. 해당 샘플은 완전립 84%다.

 

이같은 무용론은 창고업체 대부분이 영세업체라는 데서 출발한다. 약 80% 업체가 100평 정도 창고에 600톤가량을 보관하는데, 톤당 150원씩 정부로부터 보관료를 받고 있다. 양곡관리사 인건비를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셈이다. 더욱이 저온창고마다 부착된 온.습도 자동측정기록계가 30분 간격으로 온.습도를 체크해 할 일이 없다. 사람은 측정기가 잘 작동되는지 가끔 확인하는 정도다.

무엇보다 양곡관리사와 기존 직원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창고업체나 RPC에 고용된 직원이 짧게는 몇 년에서 수십년씩 해 온 일을 양곡관리사가 ‘잘 하고 있는지’ 감독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업주에게 고용인이 쌀 도정이나 보관상태를 갖고 평가하거나 지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다. 대표 본인이나 기존 직원이 자격증 취득에 나서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양곡관리사가 사장님 이거 더 깎아야 돼요, 창고 온도 너무 높아요, 할 수 있나요? 사장이 그 정도면 됐어, 하면 끝이예요.” 또 다른 관계자 ㄴ씨는 “사기업에 관리자를 파견한다는 발상 자체가 틀렸다”며 “규제를 풀어주는 시대에 유독 RPC만 갖고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중 내내 벼를 매입해 쌀로 도정해 파는 RPC는 거래처 요구에 쌀 품위를 맞추고, 정부양곡은 도정공장으로 옮겨져 정부에서 요구한 대로 방아를 찧어 놓으면 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샘플 검사 후 수급처로 보내진다. 창고에는 온.습도기가 있고, RPC는 ‘쌀 품위 분석기’를 두고 자체 관리하기 때문에 자격자를 추가로 둘 필요가 없는 구조라는 얘기다.

RPC 대표 ㄷ씨는 “양곡관리사 채용해도 관리 못해 다 썩어 못쓰게 되면 사업주가 책임지고 이물질 나오거나 품위 안 좋아도 사업주가 손해 본다”며 “차라리 농관원 같은 데서 정기 점검 한다면 말이 된다”고 말했다.

시험 절차를 가지고도 말이 많은 상황이다. 첫 시험을 치르는데 제대로 된 공지를 못 봤다는 지적이 파다하다. 시험 주관사는 (사)대한곡물협회다. ㄷ 씨는 “협회에서 공문 한 장 못 받아 봤다. 곡협 이외 사람은 정보 공유도 안 되는데 이게 무슨 시험이냐”며 “RPC협회 등 관련단체 모두에게 시험 출제 자격을 줘 신뢰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