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물벼 격리하지만…대형마트 최저가 경쟁이 ‘원흉’
산물벼 격리하지만…대형마트 최저가 경쟁이 ‘원흉’
  •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
  • 승인 2020.03.1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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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쌀값 하락, 무엇이 문제인가
거래 빌미로 RPC에 '원가 이하' 납품 압박
산지 등쳐먹는 유통구조가 문제
벼값 높고 쌀값 낮은 기형적 구조의 원인

업계에선 “산물벼 격리해 쌀값 올라갈 것”

4월 재고 소진 민간RPC…원료곡 확보 ‘비상’

농협·민간RPC 보유 8만톤 전량 격리하지만

소비지 유통업체 쌀값경쟁 방지 대책 마련해야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쌀값 하락세가 점차 뚜렷해지면서 농가와 산지유통업계의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산지 쌀 유통의 구심체인 미곡종합처리장(RPC)과 임도정공장 일각에선 현재 추세로 가다간 쌀값이 16만원대까지 떨어질 거라는 관측마저 제기된다.

1월까지 19만원대를 유지하던 산지쌀값은 2월 5일 19만44원(80kg)에서 15일 18만원대(18만9848원)로 떨어지면서 앞 숫자를 바꾸었다. 이어 25일자 18만9768원을 기록하며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에 따라 쌀값이 19만원대를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낙폭을 점차 빨리하며 16만원대까지 떨어질 것인지 여부에 업계의 관심이 모아진다.

일각에선 쌀값을 끌어올릴 기폭제로 산물벼 인수도가 거론된지 오래다. 반면 재고물량이 소진되는 내달쯤이면 자연스레 가격이 반등한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산지에서는 소비지 유통업체들의 쌀 최저가 경쟁을 쌀값 하락의 원인으로 지적하며 쌀값이 벼값보다 낮게 형성되는 고질적인 문제를 개선해야 쌀산업이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10일 RPC를 통해 매입한 2019년산 공공비축 산물벼 8만톤을 전량 인수해 간다고 발표했다.

충남의 한 민간RPC(미곡종합처리장) 공장에서 지게차로 쌀포대를 나르고 있다. [사진=유은영]
충남의 한 민간RPC(미곡종합처리장) 공장에서 지게차로 쌀포대를 나르고 있다. [사진=유은영]

쌀값 하락 원인 산재

올해 쌀 공급량이 수요량보다 부족한데도 쌀값이 내리막을 타고 있다. 쌀값이 하락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정초부터 불어닥친 코로나19 사태로 쌀 판매가 급감한 것은 시장 쌀값이 하락하는 주요 요인이 됐다. 연초 예정됐던 모임과 행사들이 취소되면서 외식업체에 원료곡을 대는 RPC들의 판매물량도 대폭 줄어들었다. 더구나 2019년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59.2kg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하면서 쌀 판매 부진에 따른 쌀값 하락이 지속될 거라는 관측에 무게를 더했다.

쌀값을 흐린 요인에는 태풍피해벼도 한몫 차지한다. 태풍피해벼는 6만톤 정도로 추산됐지만 정부에 매입된 물량 2만톤가량을 제외하고 나머지 4만톤이 저가미로 시장에 유통되면서 쌀값하락을 부추겼다.

결국 쌀값이 하락하는 원인은 태풍피해벼의 시장 유통과 지속적인 국민 쌀 소비량 감소, 코로나 사태로 인한 거래 위축, 유통업체 간 가격경쟁 등으로 압축된다. 한편 2019년산 쌀 생산량은 374만톤으로 수요량(376만톤)보다 2만톤 적다.

‘코로나19’ 효과?...사재기로 매출 ‘껑충’

현재 쌀 시장에 묘한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쌀값 하락의 원인이었던 코로나 사태가 쌀값 반등의 호재로 주목받는 것. 전국 민간 및 농협RPC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코로나19 위기경보단계가 ‘심각’ 단계로 격상된 이후 쌀 판매물량이 갑자기 증가했다. 감염을 막기 위한 이동제한 조치와 소비자들의 불안심리로 사재기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강원도 김화농협RPC의 한 관계자는 “(코로나) 위기경보 격상 전에는 예년보다 매출이 10~20% 적었는데 격상 후에는 30% 정도 올랐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코로나 이전인 작년 12~1월에도 시장 상황이 안 좋았다. 태풍피해벼가 저가미로 밀려나와 시장에 영향을 줬다”고 덧붙였다.

충남의 한 민간RPC도 “쌀이 갑자기 많이 나가는지 마트 납품 물량이 갑자기 늘었다”고 전했다.

특히 경기미는 수요가 워낙 많아 물량이 달릴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공급식 등 식자재용은 가격을 보고 사지만 가정용은 맛과 품질을 우선시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업계는 경기지역 민간 및 농협RPC의 원료곡 부족이 전체 쌀값을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전남의 RPC 관계자는 “경기미 가격의 등락은 지방미 가격에 영향을 준다”며 “경기미 가격이 오르면 지방미도 같이 올라 당분간 쌀값이 지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피해곡도 거의 소진돼서 쌀값이 올라가야 할 시점이다”고 말했다.

다만 사재기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쌀값 인상에 대한 기대감을 위축시키고 있다.

김화농협 관계자는 “10kg 쌀 한 포대면 4인 가족이 한 달 이상을 먹는다”며 “또 쌀이 생물이라 무한정 쌓아놓을 수 없다. 사재기현상도 얼마 안가 멈출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쌀값이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RPC 재고물량, 전년보다 적은데

재고물량도 쌀값에 큰 변수로 작용한다. 농협 내 재고물량은 2월 24일 기준 농협RPC(61만7000톤)와 비농협RPC(31만2000톤)를 합쳐 총 89만9000톤이다. 전년 동기(92만2000톤)에 견줘 재고물량이 적지만, 농협은 판매 부진을 이유로 일찌감치 시장격리 차원의 산물벼 인수도를 정부에 요청해 왔다.

농림축산식품부는 해마다 수확기에 민간 및 농협RPC를 통해 공공비축미 중 일부를 산물벼로 수매한다. 지난해에도 2019년산 공공비축미 매입량 35만톤 중 8만231톤을 산물벼를 수매했다. 산물벼는 민간 및 농협RPC가 갖고 있다가 시장 수급 및 가격 상황을 고려해 이듬해 3~4월쯤 정부양곡창고로 옮기거나 일부를 RPC에 판다.

산물벼 인수도를 놓고 농협과 민간 RPC 간 의견이 갈렸다. 농협은 쌀 판매가 부진하므로 쌀값 반등을 위해선 정부가 전량 인수해 가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었다. 반면 민간은 원료곡 확보 차원의 산물벼 판매를 촉구해 왔다.

민간RPC가 가진 물량은 전체 8만톤 중 2만7000톤. 재고가 충분한 농협은 산물벼를 인수하지 않을테니 민간이 2만7000톤을 산다고 해서 시장쌀값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를 설득했다.

그러나 정부가 산물벼 전량의 이관을 결정하에 따라 4월이면 재고가 거의 소진되는 민간RPC들은 원료곡 확보에 애를 먹게 됐다.

RPC 한 관계자는 “쌀값은 떨어지는데 벼값은 안 떨어져 민간RPC는 어렵다”며 “인수를 안 해주면 농협에 시세보다 500~1000원 더 주고 사야 한다. 쌀값도 같이 오르면 좋겠지만 시장쌀값이 벼값보다 낮은 현상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데 무작정 벼를 비싸게 사 놓을 순 없지 않겠느냐”고 토로했다.

또 지난해 세 번의 태풍이 불어 피해곡이 시장에 유통된 것과 관련, “내가 직접 정선해 받아놓은 산물벼는 품질을 믿을 수 있어 안심이 된다”며 “정부가 가져가면 민간은 이 물량만큼을 어차피 다른 누구한테서 사야 한다”고 말했다.

이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할인마트와 홈쇼핑방송이 쌀 최저가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할인마트와 홈쇼핑방송이 쌀 최저가 경쟁을 펼치고 있다.

 

산지-소비지, 유통 생태계 선순환 이뤄야

산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벼값이 쌀값보다 높은 기형적인 구조가 쌀 산업의 선순환을 거스르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RPC가 벼를 도정해 쌀로 팔 때 이윤이 남는 ‘계절진폭’이 생겨야만 생산과 유통이 선순환할 수 있다. RPC의 경영난은 농가 벼를 적게 사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벼값과 쌀값의 이중구조는 소비지 유통업체인 대형할인마트들의 쌀 최저가 경쟁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다.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들이 쌀을 산지 평균 도매가격보다 싼 가격에 팔며 시장쌀값을 낮추는 것은 농업계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이마트는 ‘국민가격’ 프로젝트로 경북 의성 쌀을 10kg 한 포대에 2만1900원에 판매하는 저가공세를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몰을 통해 수시로 이어갔다. 홈플러스도 신동진쌀 20kg을 4만9900원에 전단상품으로 내놓았다. 최근에는 홈쇼핑 방송까지 가세했다.

대형마트들이 거래계약을 빌미로 RPC에 저가납품을 요구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다른 RPC업체와 경쟁하며 쌀을 납품해야 하는 처지로선 거래처를 놓치지 않으려면 달라는 가격에 줘야 한다. 결국 가격 결정 권한이 산지가 아닌 소비지 유통업체에 있다는 게 시장 쌀값을 낮추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RPC 관계자는 “정부는 수확기 산지 벼 매입가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소비지 쌀값도 관리해야 한다”며 “농가를 위해 벼값을 지지했으면, 소비지 유통업체들의 원가 이하 경쟁을 막아 산지 유통업체들의 경영을 보장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협 관계자도 “RPC마다 저가납품 압박을 호소하고 있다”며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업계의 의견을 종합하면 산물벼 인수도가 시장쌀값에 잠시 효과를 줄 수는 있을 전망이다. 그러나 소비지 유통업체들의 최저가 경쟁이 전체 시장쌀값을 낮추는 근본적인 원인임을 감안할 때 이를 방지할 대책마련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