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피해 도와주진 못할망정…RPC “빚 진 게 죄”
코로나 피해 도와주진 못할망정…RPC “빚 진 게 죄”
  •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
  • 승인 2020.04.23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0 쌀 산업 기여도 평가서 퇴출규정 강화
벼 의무매입물량 기존보다 두 배로 올려
쌀 소비 줄고 판매 안 되는데 어디에 팔라고
RPC 규정도 상황변화 맞춰 변경해야

단순화 약속한 경영평가 항목 여전

‘퇴출’ 두려움에 업계 입 벙긋도 못해

개인사업자에 ‘공익성’ 강제…검토해야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산지 쌀 유통의 구심체인 미곡종합처리장(RPC)이 코로나19 사태로 판매 부진의 늪에서 허덕이는 가운데 정부가 이들의 벼 의무매입물량을 기존보다 두 배로 올려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21일 양곡유통업계에 따르면 이달 초까지 서류접수를 끝낸 ‘RPC 2020 쌀 산업 기여도 평가’가 한창인 가운데 정부는 애초의 약속과 달리 복잡한 평가지표를 고수하는데다 오히려 퇴출 규정을 강화했다.

서울시내 대형마트 매장에 쌀포대가 놓여 있다. 2020 RPC 경영평가(쌀 산업 기여도평가)에서 벼 의무매입물량을 두 배로 올려놓아 퇴출규정을 강화한 것과 관련, RPC들이 쌀 소비가 줄고 판매가 안 되는 시장 상황에 맞춰 오히려 의무매입물량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RPC는 해마다 경영평가를 받는데, 2년 전부터 쌀 산업 기여도 평가로 이름을 바꿔 업체의 경영건전성 외에 그 업체가 쌀 산업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갖가지 평가지표를 정해 놓고 점수를 매겨 일정한 기준에 미달한 업체는 퇴출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 평가기준이 RPC의 설립목적 및 기능과 동떨어져 쓸데없이 업체를 괴롭힌다는 불만이 업계에 팽배하다.

평가항목이 47가지로 너무 많고 복잡해 1년에 한 번 받는 경영평가를 위해 전담직원을 두고 몇 달씩 매달려야 하는 등 업체로선 경영에 부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농협에 비해 덜 체계화된 민간RPC는 까다로운 서류를 일일이 준비하느라 정작 경영에는 신경을 쓰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퇴출될까 두려워 1년 내내 소관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 눈치를 보는 셈이다.

농식품부는 올해 RPC 퇴출규정 중 벼 의무매입물량 기준을 수확기 2500톤에서 4000톤으로, 연간 3000톤에서 5000톤으로 각각 두 배 정도 올렸다. 코로나19 여파로 전 산업에 걸쳐 경기가 불황인데 지원대책을 써 소비 진작에 나서야 할 소관부처가 RPC 업주들의 목을 비틀어 생색내기에 골몰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한 RPC 관계자는 “쌀값이 왜 안 오르겠어요? 원래 소비량이 줄고 있었고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소비가 더 안 되기 때문”이라며 “이런 시국에 벼를 5000톤 사서 어디에 팔라고 하는 거냐. 팔 데가 없다”고 토로했다.

수확기 홍수출하하는 벼 수매를 통해 쌀값 지지와 농가소득 보전에 나서는 것이 RPC의 주요기능이긴 하지만 시국에 맞춰 요구할 걸 요구하라는 얘기다. 1988년 122.2kg이던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2018년 61kg으로 30년만에 반 토막이 났다.

이 관계자는 “쌀은 절반을 덜 먹는데 사는 건 두 배로 사라니 이건 말이 안 된다”며 “매입량도 오히려 절반으로 줄여야 논리적으로 맞다. 소비량이 반토막 났으니 1만톤 사는 RPC가 5000톤 사야 하지 않겠나”고 주장했다.

RPC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벼를 사서 도정해 쌀로 팔 때 시장 쌀값이 벼값보다 낮아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3~4년 전에 4만5000원(40kg) 했던 벼값이 지금은 6만원대로 회복해 같은 값에 살 수 있는 물량이 대폭 줄었다. 상황 변화를 외면한 채 역행하는 정부 정책에 원성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수확기 벼 매입자금을 저리로 대출받을 수 있도록 RPC에 정책금융상품을 지원해 주고 있다. 대신 해마다 경영평가(쌀 산업 기여도 평가)를 해 규정에 안 맞는 업체는 퇴출시킨다. RPC 경영평가는 불필요한 평가항목이 47가지나 되고 오.탈자에도 감점을 주는데다 접수시간 5분을 넘겨도 서류를 안 받아줘 ‘대입 수능시험’이라는 빈축을 사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단순화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기존에 중복되던 항목 두 가지만 없앴을 뿐이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항의하지 못하는 건 관리당국에 밉보여 RPC에서 퇴출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작년에 빌린 돈을 올해 빌린 돈으로 갚아 1년씩 연명하는 RPC로선 빚을 한번에 청산해야 하는 퇴출은 곧 도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충남의 한 RPC 업주는 “예부터 양곡정책은 비싸게 사주고 싸게 파는 이중곡가제로 매년 적자 메우기에 바빴다”며 “이 사업에 뛰어든 게 후회되고 늘 조마조마하다. 개인 사업자에게 ‘기여도’라는 공적 측면으로 압박하니 빚 진 게 죄인이다”라고 호소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RPC 경영평가 후 A~E 등급으로 나눠 0~2%까지 이자를 물리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요샌 시장도 제로금리 아닌가. 쌀을 팔아 마진을 남길 수 없는 구조라 매해 손해 본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다른 부처에선 소관 기업들에게 뭐든 하나라도 지원해 주려고 하는데 농식품부는 발로 차서 물에 빠뜨리려고 한다”며 “농협처럼 적자 보전이 되는 곳엔 공익에 기여하라고 할 수 있지만 민간RPC는 업체가 망하면 개인이 모조리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