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에 갇힌 RPC…‘집단 폐업’ 공론화 시작
규제에 갇힌 RPC…‘집단 폐업’ 공론화 시작
  •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
  • 승인 2020.04.2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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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산업 기여도평가’ 단순화 약속 두 번 어겨
경기도에서만 2개업체 평가 포기…“못해먹겠다”
쌀 산업 기여 못할 업체 ‘폐업 길’ 열어 달라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정부가 매해 실시하는 RPC(미곡종합처리장) 기여도 평가를 포기하는 업체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 28일 산지 쌀 유통업계에 따르면 경기도 안성의 한 RPC 업체는 올해 기여도 평가를 신청하지 않았다. 경기도에서만 작년 연천에 이은 두 번째 사례다.

RPC 공장 전경
RPC 공장 전경

농림축산식품부는 매년 일정한 기준에 따라 ‘RPC 쌀 산업 기여도 평가’를 실시한 뒤 A~E 등급으로 나눠 0~2%까지 금리에 차등을 둔 벼 매입자금을 각 업체에 배정하고 있다. 따라서 기여도 평가를 받지 않으면 벼 매입자금 또한 배정되지 않는다.

이 업체가 벼 매입자금 저리 대출을 포기한 이유는 RPC에 대한 평가 항목이 너무 까다롭고 복잡한 때문으로 알려졌다.

경영평가가 기여도 평가로 이름을 바꾼 것은 2년 전이다. 각 업체별 재무구조나 건전성을 들여다보는 기존 경영평가에다 그 업체가 쌀 산업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추가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 전에 10여개였던 평가항목을 47개로 대폭 늘리고 RPC업체가 위치한 지자체의 논 타작물재배 실적, 쌀 산업발전계획 수립 여부 등에도 점수를 매겼다. 기본 평가 항목 25개에다 부가적 항목이 22개가 달렸다.

단순화 약속…뚜껑 열어보니 ‘날벼락’

RPC 입장에선 이런 정부 조치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예전 경영평가도 RPC 운영목적과 상관없는 불필요한 것들이 많아 영업에 지장을 초래하니 단순하게 줄여달라고 농식품부 주무부서 담당과장과 사무관에게 수시로 건의해 왔던 터였다. 농식품부는 RPC 관계자들과 간담을 갖고  이런 의견들을 청취한 후 불편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개선하겠다고 얘기했다.

RPC들은 몇 달씩 평가 준비에 매달리지 않고 경영에만 신경 쓰게 되리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올랐다. 특히 민간RPC 쪽에서 환호했다. 직원 서너 명 두고 운영하는 민간RPC는 개인 사업자라 아무래도 정부 평가를 위한 각종 서류 준비에서 농협보다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단순화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기여도 평가’로 이름을 바꿔 규제를 강화해 RPC로선 ‘날벼락’을 맞았다.

오히려 퇴출규정은 2배 강화

2018~2019년 기여도 평가를 치르면서 RPC 업주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RPC 운영목적에 맞게 평가항목도 벼를 제대로 샀는지, 계약재배를 확대했는지 두세 가지만 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정부에 거듭 요청했다. 마침내 정부도 지난해 평가를 진행하면서 앞으로 벼 매입실적, 계약재배 면적만 보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했다. 인사이동으로 자리를 옮긴 당시 사무관은 지난해 5월 설명회에서 “평가를 받느라 힘들어하는 것 안다. 다른 부수적인 건 형식적으로 보고 두 가지만 보겠다”고 공언했다. 이 얘기를 하는 과정에서 “RPC 기여도 평가를 폐지하겠다”는 말까지 나와 업계가 요동쳤었다.

업계 관계자는 “폐지 이야기까지 나와 올해는 평가항목이 단순해질 거라고 기대했었다”며 “그런데 겨우 중복된 2개 항목만 없앴을 뿐 여전히 평가가 까다로워 업주들이 못해먹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평가항목의 퇴출규정은 이전보다 더욱 강화했다. 수확기 벼 의무매입량과 연중 벼 매입실적 기준을 각각 2배로 올려놓은 것이다. 쌀 소비량 감소와 쌀 판매 부진이라는 늪에 빠진 현재 쌀 산업에서 이같은 규정은 현실을 외면한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충남의 RPC 관계자는 “쌀 소비량이 반토막 났으면 RPC 벼 매입량도 반으로 줄여야 맞는 것 아닌가”라며 “우리는 벼를 사들여 쌀로 도정해 파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윤을 남겨야 살 수 있는 개인 사업자에게 공익성에 기여하라고 하니 말이 되는가”라고 토로했다.

빌려 쓴다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RPC는 쌀 시장 개방에 대응해 1992년 도입한 제도로, 동네 방앗간이 법에서 정한 일정한 자본과 규모를 갖춰 신청하면 심사 후 RPC로 지정받는다. 수확기(10~12월) 홍수출하 되는 신곡을 매입해 산지 쌀값을 지지하는 것이 주요 기능이다. 때문에 RPC가 되고 나면 정부가 매해 예산으로 책정하는 정책금융상품인 벼 매입자금을 저리로 융자받아 쓸 수 있다. 여기에는 해마다 1조 2308억원의 예산이 책정된다.

정책금융이라고 하지만 금융기관을 통해 대출 받는 과정은 다른 일반 자금과 다를 게 없다. RPC 업주는 은행이 요구하는 담보를 제공하거나 농신보 신용보증을 이용해 대출받는다. 농신보 보증도 59억원까지 확대했지만 실제 보증 인정액은 23억원이 최고액수다. 여기에도 수수료를 내야 해 실제 대출이자는 최고 2%가 아닌 4%에 달하는 셈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RPC 업계의 원성이 나온다. 개인이 돈을 빌려 갚아야 할 책임을 개인이 지는데 공익성의 잣대를 들이밀어 1년 내내 평가준비에 매달리게 만드느냐는 거다.

업계 관계자는 “RPC 목적과 상관없는 평가항목이 지나치게 많다”며 “이것이 개선되지 않으면 조만간 민간 쪽은 공멸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2020 RPC 쌀 산업 기여도 평가는 이달 초 서류 접수를 시작해 지난 27일까지 현장실사를 마쳤으며 6월말까지 자금을 배정할 예정이다.

인수합병 추진, 폐업 길 열어줘야

실제 RPC 업주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동 폐업’을 논의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경기도의 한 업주는 “RPC 간판 반납해야지 못해 먹겠다. 단체로 서명해서 반납하자고 회의 때마다 얘기한다”며 “돈 좀 빌려 쓴다고 이것저것 수 백 가지 규정만 들이대고 있으니 누가 더러워서 하겠나. 돈 안 쓰고 말지”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폐업도 쉬운 선택은 아니다. 폐업하는 순간 그간 정부로부터 빌린 돈을 한번에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쌀값이 높은 경기도 지역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값이 오른 부동산을 팔아 빚을 갚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 년 동안 쌀값 침체로 적자가 누적된 타 지역 RPC들은 수 십 억 원에 달하는 빚을 일시에 갚을 방도가 없다. 올해 받은 빚으로 지난해 받은 빚 가림을 하는 대부분의 RPC들에게 ‘폐업 지원책’ 마련이 필요한 이유다.

업계는 정부가 인수합병 비용 70%를 지원해 RPC의 대형화를 추진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기여도 평가로 전환한 이후 개인 사업자로서 도저히 기여할 수 없는 업체는 농식품부가 그간 수확기 쌀값지지에 기여한 공을 인정해서 부드럽게 퇴출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며 “군청, 도청 등 지자체가 (인수합병) 중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가을에 (벼를) 산 금액 있고 쌀값 보면 뻔히 실상을 알 것”이라며 “적자 메우느라 꾸역꾸역 여기까지 왔다. 얘기를 하면 서로 교감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하니까 이젠 의욕을 상실해서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고 농식품부에 서운한 감정을 토로했다.

정부는 지난 1989년 에너지환경이 변화하자 태백, 삼척, 화순 등지 탄광의 폐광을 지원하는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을 추진했다. 쌀 산업도 정부 주도로 움직이니 RPC 폐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농식품부는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모양새다. 식량산업과 관계자는 “민간RPC와 농협RPC가 산지 쌀 유통의 구심체로 나란히 성장하길 바란다”며 RPC 구조조정 의혹을 부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