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계가 일하는데…양곡관리사로 고용창출 못해

창고에 온도계, RPC엔 ‘곡립판정기’ 사람 할 일 없어 수십년 경력 기존 직원과도 충돌 불가피, 결국 사라질 것

2019-12-17     유은영 기자

(사)대한곡물협회 주관 시험절차상 신뢰성 확보 문제 제기도

한국RPC협회 등 관련단체들도 시험 출제 참여시켜야

"공문 한 번 못 받아봤다" 항의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정부가 도입한 양곡관리사가 당초 목표한 일자리창출 효과도 없을 것으로 나타나 ‘무용론’에 기름을 부을 전망이다.

16일 정부양곡 창고업계 및 미곡종합처리장(RPC) 업계에 따르면 오는 21일 첫 자격증 시험에 업체 대표들이 응시한다.

이날 전북 및 충남의 민간RPC 업체들에 문의한 결과 대표 본인 또는 함께 일하고 있는 가족이 응시하는 경우가 100%에 가까웠다. 나머지는 응시원서 접수 시기를 놓쳐 다음 번 시험을 보는 업체들이 소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사람을 쓰느니 대표 자신이 자격증을 따 바뀌는 제도에 대비하겠다는 의미다.

양곡관리사 도입이 논의됐을 때부터 업계에선 불필요한 제도라고 입을 모았다. 정부양곡 관리체계 정립과 쌀 품질의 고급화 기반이라는 도입 목적 자체가 현장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가정주부들이 밥 할 수 있나 없나를 시험 보는 거랑 똑같아. 창고 온.습도만 보면 되는데 무슨 자격증이 필요해. 눈 감고도 창고 관리 다 하는데.”

한 RPC 업체 대표 ㄱ씨는 “70 다 돼 가는 사람이 수 십 년간 해 온 것을 책을 보고 외우려니 아주 지겹다”고 토로했다.

정부양곡 창고 또는 RPC 업주들은 개업과 동시에 사업 운영에 필요한 쌀 품질관리를 해 왔기 때문에 굳이 자격증을 따라는 것은 불필요한 규제라는 의미다.

사실 정부는 양곡관리사 자격증 소지자를 고용하라고 했지 대표 본인에게 취득을 강제하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애써 시험 준비에 나서는 건 비용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다.

ㄱ씨는 “창고만 들여다보면 되는 일에 사람을 쓸 수 없지 않겠느냐”며 “양곡관리사 업무가 관리감독하는 일이라 다른 직원과도 위화감이 생겨 본인도 견디기 힘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저온창고에
RPC의

 

이같은 무용론은 창고업체 대부분이 영세업체라는 데서 출발한다. 약 80% 업체가 100평 정도 창고에 600톤가량을 보관하는데, 톤당 150원씩 정부로부터 보관료를 받고 있다. 양곡관리사 인건비를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셈이다. 더욱이 저온창고마다 부착된 온.습도 자동측정기록계가 30분 간격으로 온.습도를 체크해 할 일이 없다. 사람은 측정기가 잘 작동되는지 가끔 확인하는 정도다.

무엇보다 양곡관리사와 기존 직원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창고업체나 RPC에 고용된 직원이 짧게는 몇 년에서 수십년씩 해 온 일을 양곡관리사가 ‘잘 하고 있는지’ 감독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업주에게 고용인이 쌀 도정이나 보관상태를 갖고 평가하거나 지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다. 대표 본인이나 기존 직원이 자격증 취득에 나서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양곡관리사가 사장님 이거 더 깎아야 돼요, 창고 온도 너무 높아요, 할 수 있나요? 사장이 그 정도면 됐어, 하면 끝이예요.” 또 다른 관계자 ㄴ씨는 “사기업에 관리자를 파견한다는 발상 자체가 틀렸다”며 “규제를 풀어주는 시대에 유독 RPC만 갖고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중 내내 벼를 매입해 쌀로 도정해 파는 RPC는 거래처 요구에 쌀 품위를 맞추고, 정부양곡은 도정공장으로 옮겨져 정부에서 요구한 대로 방아를 찧어 놓으면 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샘플 검사 후 수급처로 보내진다. 창고에는 온.습도기가 있고, RPC는 ‘쌀 품위 분석기’를 두고 자체 관리하기 때문에 자격자를 추가로 둘 필요가 없는 구조라는 얘기다.

RPC 대표 ㄷ씨는 “양곡관리사 채용해도 관리 못해 다 썩어 못쓰게 되면 사업주가 책임지고 이물질 나오거나 품위 안 좋아도 사업주가 손해 본다”며 “차라리 농관원 같은 데서 정기 점검 한다면 말이 된다”고 말했다.

시험 절차를 가지고도 말이 많은 상황이다. 첫 시험을 치르는데 제대로 된 공지를 못 봤다는 지적이 파다하다. 시험 주관사는 (사)대한곡물협회다. ㄷ 씨는 “협회에서 공문 한 장 못 받아 봤다. 곡협 이외 사람은 정보 공유도 안 되는데 이게 무슨 시험이냐”며 “RPC협회 등 관련단체 모두에게 시험 출제 자격을 줘 신뢰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