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RPC를 죽이나…‘산물벼 도정’ 문 열어라
누가 RPC를 죽이나…‘산물벼 도정’ 문 열어라
  •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
  • 승인 2020.07.2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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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금 깨고 부동산 팔아 간신히 버티는 RPC들
대출 얻으려니 어렵다 말 못해, 현실은 ‘풍전등화’
세금 못 내 구속되고...광주선 마지막 남은 업체 폐업

RPC 제도 도입 1993년...27년 동안 꾸준히 폐업

광주전남만 26곳 들어와 다 망하고 마지막 업체도 이달 초 폐업

공공비축제도 하에서 정부 대신 적자 지며 쌀 산업 이끌어

최근 10년 간 두 해만 이윤 남아...멈추면 쓰러지는 '외발 자전거'

유산으로 물려받은 타월공장, 버스회사 팔아 RPC 공장 돌려...'돈 먹는 하마'

벼 매입해 쌀로 팔려면 '대출' 얻어야 해 "어렵다" 소리도 못해

 

공공비축 산물벼 'RPC'에 맡기면 경영 '숨통'

GSnJ 연구 "정부양곡 20만톤 RPC 도정시 정부예산 135억 절감"

쌀 산업 이윤 내기 어려운 구조...정부지원은 없어

업주들 꾸역꾸역 버티다 결국 재산 탕진하고 '빈털터리'

탄광, 어선, 농산물도 정리하면 폐업지원금

RPC도 산지쌀값 지지 공로 인정해 폐업 지원해야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산지 쌀 유통의 구심체인 미곡종합처리장(RPC)들이 수 년 간 지속된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다.

RPC가 사업의 한 분야로 속한 농협이 아닌, 개인 사업자가 운영하는 민간RPC 이야기다. 업계에선 최근 들어 정부가 규제를 강화한 것이 RPC가 스스로 사업을 접게끔 유도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나온다.

 

한 민간RPC 공장에서 지게차로 쌀포대를 나르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없음[유은영 기자]
한 민간RPC 공장에서 지게차로 쌀포대를 나르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없음[자료]

 

이달 초 광주에선 무등미곡종합처리장이 폐업했다. RPC 제도가 도입된 27년 전 광주전남 지역에 들어온 26개 RPC 가운데 그간 25곳이 폐업하고 마지막 남은 한 곳이었다.

이 모 대표는 석탑산업훈장까지 받았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지만 계속된 적자에는 버티질 못했다. 부모님 유산으로 물려받은 타월공장이며 부동산들을 팔아 위기를 모면해 왔지만 결국 농가와 거래처 등에 진 빚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직원들 밀린 임금을 정리하고 팔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팔아도 빚이 해결되지 않았다. 50년 가까이 정미업 외길만 걸어온 그는 나이 팔순에 빈털터리가 됐다.

세금을 못 내 구속된 사람도 있다. A씨는 고려시멘트에서 40억에 사겠다고 했을 때 팔지 않은 걸 그동안 뼈저리게 후회했다. 공장은 벌써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 지 오래다.

RPC 제도가 도입된 건 지난 1993년. 150개였던 민간RPC는 27년 동안 64개로 줄어들었다. 농협까지 합치면 350여곳에서 출발해 현재 196개다.

쌀 산업은 항상 어려웠지만 최근 10년 동안엔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계절진폭이 생긴 해가 두 해에 불과할 정도로 수익 내기가 어려운 구조가 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RPC 업주들은 부동산이며 재산을 정리해 적자를 메워가고 있는 형편이다.

충남의 C 업주는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교통운수업체를 올해 3월 정리했다. 80억 거액을 받았지만 RPC 운영자금으로 사라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C 업주는 “빚 갚고 운영비로 썼더니 80억이 두달 만에 없어지더라”고 토로했다.

경북의 D씨도 “그간 큰 부동산만 두 개 팔아먹었다”며 “할아버지, 아버지가 하던 것을 내 손으로 문을 닫을 수 없어 꾸역구역 버텨왔다”고 하소연했다.

시설 투자에 들인 돈이 많아 폐업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곳도 있다. 시설현대화 정부 지원비율이 60%라고 해도 최소 30억원 정도 자부담이 들기 때문에 빚을 갚느라 사업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전북의 E씨는 “현대화 시설은 기존 설비보다 동력이 훨씬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동.유지비용이 늘어나고 관리 직원도 더 필요하다. 실제 투입되는 돈은 시설투자비의 두 배로 보면 된다”며 “계속 공장을 가동해야 이자를 갚고 직원 월급을 줄 수 있으니 어떻게든 끌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좋은 시설에서 나온 쌀이라도 소비자들은 500원이라도 더 싼 곳을 선호하니 투자비 회수는 꿈꾸기도 어렵다”고 토로했다. E씨는 이런 RPC의 상황을 멈추는 순간 쓰러지는 ‘외발 자전거’를 타고 있다고 비유했다.

더 이상 팔 자산이 없어지면 기다리는 건 폐업이다. 광주에 있었던 제법 큰 규모의 RPC 공장 동○○업도 부동산을 팔아 운영비를 대다가 결국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은행서 대출 얻으려니 힘든 내색 못해 ‘딜레마’

아이러니한 건 적자에 시달려도 사업이 잘 되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RPC의 숙명이다. 정부가 해마다 정책자금으로 지원하는 벼 매입자금을 금융기관에서 빌리려면 너도나도 부자 행세를 해야 한다. 은행으로선 빚을 갚을 여력이 있는지를 가장 먼저 보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RPC가 다들 돈 버는 걸로 알고 있다. 농가며 정부며 우리가 외제차 타고 명품백 멘다고 하는데 현실은 ‘풍전등화’”라며 “정부 지원 없이는 RPC 업계가 수 년 내 고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통구조 개선 어려워...정부 지원이 가장 빠른 해결책

수확기 RPC가 수매한 산물벼는 RPC서 도정토록 허용해야

지금 RPC를 살릴 가장 좋은 해법은 쌀 유통구조를 수익이 나는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RPC가 농가들을 위해 생긴 제도임을 감안하면 벼값이 쌀값보다 비싼 이중곡가 구조를 쉽사리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로선 RPC에 대한 정부 지원책 마련이 최선이다. 추곡수매제가 공공비축제로 바뀌면서 정부 할 일을 대신 빚을 져가며 담당해온 RPC의 공로를 생각하면 당위성은 충분하다.

가장 먼저 ‘RPC의 산물벼 도정’ 허용이 업계의 경영난 타개책으로 지목된다. 현재 정부양곡 가공임으로 책정된 예산은 1톤당 10만원. 올해 기준으로 산물벼 8만톤을 RPC에서 도정하게 한다면 모두 80억원의 가공임을 받아 경영에 큰 도움이 된다. ‘RPC 산물벼 도정’은 RPC 업계의 오랜 숙원이다. 시장 경쟁 때문에 일반 쌀 20kg를 가공할 때 가공료를 2500원도 못 받는 게 RPC의 현실이다.

RPC 업계의 어려움은 시장경쟁 할 것 없이 정부미 도정만 하면 되는 정부양곡 도정공장과 극명히 대조된다. 정부양곡 도정공장들은 최근 3~4년 동안 한창 구곡이 많아 정부비축미가 사료며 가공용으로 도정될 때 업체당 10억씩은 벌었을 거란 계산이다.

한 RPC 업주는 “민간RPC는 농협보다 자금력이 달려 1년치 쓸 벼를 한번에 사질 못한다. 정부가 이런 사정을 고려해 산물벼도 우리가 사 쓰게끔 인수도 해 줬었는데 요즘엔 그마저도 안 되고 기여도 평가니 뭐니 규제만 심해져 운영이 힘들다”고 호소했다.

사실 최근 3년 동안 농림축산식품부는 강도높게 RPC 규제를 강화했다. 때문에 업계에선 정부가 구조조정에 나선 것 아니냐는 추측이 예전부터 나왔다. 이같은 추정은 정부가 버티는 사람만 데리고 가겠다는 것 아니겠냐는 해석을 낳으며 업계에 허탈감을 안기고 있다.

그러나 RPC가 정부 정책으로 도입된 제도임을 감안하면 시장경쟁 원리에 의해 자연적으로 도태되도록 놔 두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한 관계자는 "탄광도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폐광을 지원하지 않았나. FTA로 피해를 본 농축수산물도 폐업지원을 하고 있다"며 "우리 RPC도 정부 정책으로 생겨났으니 농협과의 인수합병 등 폐업지원책을 마련하는 게 이치에 맞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