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8주년특집Ⅱ-RPC 해법①] 수확기 홍수출하 벼 매입…쌀값 지키느라 ‘빚투성이’
[창간8주년특집Ⅱ-RPC 해법①] 수확기 홍수출하 벼 매입…쌀값 지키느라 ‘빚투성이’
  •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
  • 승인 2020.10.2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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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산업 보루 RPC, 적자누적·규제 강화로 사라질 판
1992년 국제시장 개방서 국민주식 지키려 설립
130개였던 민간RPC…28년 동안 살아남은 건 30개

농가 벼 사들여 시장격리 효과, 쌀값지지 기여

추곡수매제 때 정부가 떠안던 손실 그대로 떠안아

쌀값 유지 안 돼 적자 누적…일정부분 보전해줘야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농촌에서 자란 40대 이상에선 어린 시절 추억을 장식하는 배경에 ‘방앗간’이 공통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우리나라 벼농사의 시작은 유적지에서 출토된 볍씨를 토대로 신석기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방앗간은 시대마다 모습을 달리하며 농민과 농촌의 동반자로 성장했다. 그러다 90년대 들어서 쌀 농가와 함께 국민 주식을 지키는 쌀산업의 보루(堡壘)가 됐다. FTA(자유무역협정), 우루과이라운드(UR) 등 국제시장 개방 압력에 맞서 한국 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정부가 방앗간을 미곡종합처리장(RPC)으로 육성을 시작하면서다.

RPC 벼 수매 현장.
RPC 벼 수매 현장.

 

고품질쌀 2차 생산자

미곡종합처리장(RPC)은 벼의 수집·건조·저장·가공포장·판매를 일괄 처리하는 시설로 초기 역할은 농촌 노동력 절감에 집중됐다. 벼를 건조하지 않은 산물벼 형태로 농가로부터 사들여 일손 부족 해소와 생산비 절감에 크게 기여했다. RPC의 시초는 1991년 세워진 충남 당진 합덕농협RPC다.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해 2001년까지 전국에 328곳이 보급된다.

2002년부터는 정부가 쌀 정책의 초점을 수량에서 품질로 전환하면서 RPC도 미곡 품질향상과 유통으로 역할의 범위를 한층 확대했다.

고품질쌀에 대한 1차적 생산자는 쌀 농가이지만 그 쌀이 고품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적의 상태로 지켜주는 RPC는 2차적 고품질쌀 생산자라고 할 수 있다. 저장기간이 다른 농산물보다 비교적 긴 쌀의 특성을 감안하면 소비자에게 최종 도달하는 쌀의 품질은 생산보다 보관·저장 방법에 따라 좌우된다고 봐야 한다.

한국식품연구원 연구결과에서도 RPC의 가치는 증명된다. 식미(밥맛)가 낮은 품종의 벼를 수확 후 이상적인 방법으로 관리했을 때 A~D로 나눈 쌀 품위등급 중 B 등급을 받았다. 반면 고품질품종의 벼를 부적절하게 관리했을 때는 최하위인 D등급이었다.

벼 매입해 시장격리 효과

RPC의 핵심적인 기능 중 한 가지는 산지쌀값의 지렛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수확기 홍수출하되는 농가벼를 사들여 시장에서 물량을 격리하는 효과를 내 쌀값 폭락을 방지한다. 정부는 수확기 벼 매입에 쓰라고 RPC에 벼 매입자금을 0~2%의 저금리로 지원한다. 방앗간과 RPC를 구별하는 큰 차이는 벼 매입자금 지원 여부에 있다.

RPC가 되면 벼 매입자금 지원을 받지만 의무도 지게 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해마다 RPC에 대한 ‘쌀 산업 기여도 평가’를 하는데 결과에 따라 A~E 등급을 매겨 지원자금 배정과 금리에도 차등을 둔다. RPC는 각자가 지원받은 금액의 1.5배에 해당하는 벼를 수확기(10~12월)에 의무적으로 사들여야 한다. 이것도 최소 4000톤은 사야 다음 평가에서 퇴출되지 않는다. 정부는 작년부터 수확기 벼 매입실적 기준을 기존 2500톤에서 4000톤으로 상향 조정했다. 연간 벼 의무매입량도 3000톤에서 5000톤으로 늘렸다. 이 기준을 맞추지 못하는 RPC는 다음해 평가에서 RPC에서 퇴출돼 벼 매입자금 지원을 받지 못한다.

농협도 민간도 적자

RPC들은 대부분 동네 방앗간이 자본과 시설을 키워 RPC로 진입한 곳들이다. 방앗간뿐이었던 1980년대까지는 쌀 자급률이 충분치 못해 춘궁기를 겪던 배고픈 시절이었다. 전년에 수확해 둔 양곡이 떨어져가는 단경기(7~9월)면 농민들에게 쌀을 꿔주고 돈을 빌려줬다. 동네 창고, 동네 은행과 같은 역할을 했다. 동네 방앗간이었을 때에도, RPC로 몸집이 커진 뒤에도, 도정업체는 농민의 든든한 동반자로서 농촌을 지키고 쌀산업을 지키고 있다.

이런 RPC가 최근 들어 강화된 규제와 손실 누적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사실 RPC 적자 문제는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RPC 설립 이후 10년이 지난 2002년 농협RPC 200곳 중 64.5%에 해당하는 129곳이 적자를 봤다. 개소당 평균 적자금액은 1억2700만원이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의 누적 손익은 총 759억원에 달한다. 개소당 3억8000만원의 누적 적자를 안고 있는 셈이다.

다만 농협은 RPC가 사업부서 중 하나라 적자에 대한 부담을 개인이 안아야 하는 민간RPC보다 리스크가 덜하다. 민간RPC는 개인이 운영하는 일반 기업이기 때문에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거나 손실을 봐도 그에 따른 수혜나 위험부담은 철저히 업주 몫이다.

올해 6월 ‘2020년 쌀 산업 기여도평가’를 통과해 RPC 지위를 유지한 기존 업체 및 신규 업체는 총 196개다. 이 중 민간이 64개, 농협은 132개다. 민간RPC는 RPC 도입 초기 130개에서 28년을 지나는 동안 절반가량 줄었다. 매해 평가를 통해 신규로 진입하는 업체를 감안하면 기존 업체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업체는 30~40개 정도다. 이는 민간RPC의 고달픈 행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매입자금 지원 대신 의무도 커

RPC, 특히 민간RPC가 경영난을 겪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쌀값이 안정적인 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RPC는 정부를 대신해 공공비축산물벼 매입 외에도 농가로부터 벼를 사들여 쌀로 도정해 소비지 유통업체에 납품하는 쌀 도매업체다. 쌀값이 인상되면 벼값도 당연히 올라간다. 쌀값이 비쌀 때 벼를 사뒀다가 나중에 쌀값이 떨어지면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한다. 이런 현상을 역계절진폭이라고 하는데, RPC단체에 따르면 20년 동안 70%인 16년은 역계절진폭이 발생해 적자를 봤다. 최근 10년 동안에는 사상 최대 규모의 시장격리를 단행한 2017년과 2018년, 그리고 약보합세를 유지했던 지난해를 제외하고는 쌀값이 줄곧 하락해 손실이 누적됐다.

이에 따라 RPC가 정부 육성 시설인만큼 정부가 적자에 대한 보전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공익직불제 시행 이전 작년까지 쌀 농가를 대상으로 운영됐던 변동직불금처럼 쌀 유통업체에도 시장쌀값의 일정부분을 보전해주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RPC 관계자는 “의무매입량을 지키기 위해 벼를 사 놨는데 이후 쌀값이 떨어져 손실을 보는 일이 반복됐다”며 “벼 매입자금을 주고 벼를 사라고 맡겼으면 적자에 대한 보전도 해 주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규제 강화하고 혜택은 줄어

2005년 이전까지 정부는 수확기 때 농가벼를 비싸게 사들이고 다음 연도에 시중 물량이 부족해지면 저가로 푸는 ‘이중곡가제’의 추곡수매제를 운영했었다. 이후 공공비축제도 하에서 RPC가 정부를 대신해 벼 매입을 맡게 됐고 정부가 떠안았던 손실부담도 함께 떠안게 됐다. 정부자금을 주어 벼 매입 대행을 시켰으면 손실은 안 보게끔 쌀값을 적정수준으로 유지시켜 주든가 적자 본 금액을 정책적으로 보전해 줘야 맞지 않느냐는 게 RPC 업계의 주장이다. 물론 정부는 벼 매입자금을 빌려 쓰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 하지만 RPC를 육성시켜 일정한 역할을 부여한 이상 민간RPC도 양곡정책을 수행하는 정부의 위탁단체로 봐야 한다. 더구나 시중금리가 10~15%였던 예전과 달리 현재 한국은행 기준금리 0.75%에서는 RPC에 대한 저리(0~2%) 대출이 특혜라고도 할 수 없다. 때문에 적자보전을 요구하는 RPC 업계의 논리를 부인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최근 3년 동안 RPC에 가해진 규제 압박도 조정이 필요하다. 정부는 예전 경영평가에서 ‘쌀 산업 기여도 평가’로 이름을 바꿔 RPC를 매해 평가하는데 평가항목이 45가지에다 준비가 까다로워 원성이 자자한 상황이다. 농협에 비해 경영규모가 영세한 민간RPC는 전담 인원 1~2명을 채용해 1년 내내 평가 준비에만 매달려 ‘RPC는 매해 수능을 치른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업계에 돌고 있다. 게다가 작년부터는 수확기 의무매입 비율을 지원자금의 1배에서 1.5배로 올리고 최저 의무매입물량과 연간 매입물량 기준도 상향 조정했다.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줄고 정부가 나서서 벼 재배면적 감축 정책을 펼치고 있는 마당에 RPC에게만 물량을 늘려 사라고 규제를 강화한 것이다.

RPC 관계자는 “쌀 소비 감소 추세에 맞춰 정부는 쌀 생산 감소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며 “RPC로선 확보할 수 있는 물량 자체가 줄어드는데 의무매입량을 늘리는 것은 현장을 외면한 탁상행정”이라고 지적했다.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