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작성하던 판매장부…포스&회계 통합 프로그램 개발
1만명 유통인에 ‘퇴근 후 여가시간’ 찾아준 ‘시스템 현대화’ 이뤄
회원가입 '붐' 강서 시장도매인의 '디지털 유통혁신' 선도
‘이타(利他)’와 IT가 함축된 의미 '이타넷'
현장서 손으로 기록하면 경리직원이 재입력
재고 맞춘 다음에야 낮 12시 퇴근..."바꾸고 싶었다"
'터치' 한 번으로 현장과 사무실 업무가 동시에 끝
세상에 없던 물건, '농수산물 도소매 플랫폼'으로 진화시킬 것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옷은 원래 여름에 한 벌, 겨울에 한 벌씩만 입는 줄 알았어요.”
지지리도 가난했던 소년, 전라도 남해바다 인근의 시골마을에서 고등학교를 간신히 마친 그를 기다리는 건 노가다판이었다. 대학생이 부러웠던 그는 닥치는 대로 일해 학비를 벌며 대학엘 갔고 남들처럼 직장을 잡아 취직했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가락시장으로 왔다.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식당 창고와 당구장 당구대에서 먹고 자고 할 때, 안양 육교에서 군고구마를 팔 때 늘 머릿속을 맴돌던 꿈이었다.
그렇게 가락시장 생선 도매상 점원이 된 그는 10년만에 수산물 중도매인 자격을 얻어 (유)세림씨푸드 대표가 된다. 백남곤 대표는 회사 설립 3년만에 판매왕 달성에 이어 2015년 가락시장 3400여 업체 중 단 한 개 업체가 받을 수 있는 최우수 중도매인상을 수상하는 등 줄곧 판매왕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상도를 벗어나지 않는 철저한 상인정신과 고객중심 거래로 2016년 연매출 200억(수산 3개 사업자 총합)의 탄탄한 중견기업이 됐다.
이제 백 대표는 '남을 이롭게 하는 일(利他)'에 몰두하고 있다. 6년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아이티기업 ㈜이타넷은 도매시장 상인들의 퇴근 시간을 두 시간씩 앞당겨 주고 있다. 지난달 6일 백 대표와 만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밤낮 없이 일하는 이 분들에게 편안한 안식처인 집이라는 단어에는 삶의 애환이 담겨 있어요. 도.소매 매출관리 프로그램 이타넷으로 밤새 일하며 낮 12시에 퇴근하는 상인들에게 삶의 여유와 꿀잠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생선 도매상 점원 시절은 어땠나.
당시 몸무게 50kg로 배달일을 했다. 생선 리어카를 끌며 하루 80톤을 들었고 40km를 이동했다. 토요일 일요일 가리지 않고 매일 15시간씩 근무했다. 이 자리에서 꼭 성공하고 싶다는 일념하나로 열심히 일했다. 내 일을 하는 지금이 오히려 너무 편하다. 만일 신(神)이 있어 그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더 큰 미래를 보장한다 하더라도 돌아가지 않겠다. 죽을 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매우 가난했다고.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못 갔던 그때서야 가난하다는 걸 알았다. 원래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다. 동네 형한테서 물려받은 옷 한 벌로 사계절을 나고 고무신을 신고 비포장 도로를 걸어 학교 다니고 초가집에서 감자, 고구마를 밥 대신 먹는 게 일상이었다. 대학은 생각도 못하고 가구 배달, 제약공장, 납땜질, 노가다, 식당 알바, 온갖 일을 다 했다. 기술 학원 다니며 알바하던 당구장에서 대학생들을 봤는데 너무 부럽더라. 안양에 있는 대림대학교를 갔고 식당 창고에서 먹고자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취직도 했었는데 왜 가락시장으로 왔나.
1997년 첫 월급 60만원을 받았는데 도저히 앞이 안 보였다. 안양 육교에서 군고구마 팔 적에 내게 장사 수완이 있다는 걸 느꼈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게 꿈이었고. 장사를 배워보자, 어디 가서 배울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게 가락시장이더라. 무작정 올라와 생선 도매상 점원으로 취직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건 군고구마 장사, 항상 믿어준 아내이며 전 사장님에게도 늘 감사한 마음이다.
-사업이 빠르게 성장했다.
상황이 안 좋을 때 창업해서 한 달만에 확장시켰다. 그렇다고 남의 손님 뺏은 건 절대 아니다. 새 고객을 잡아 그 고객을 성장시키며 이 자리에 왔다. 시장 상인들도 내가 배달할 때부터 봐 와서 인정해 주신다. 남의 손님이 오면 먼저 문제가 뭐냐고 물어보고 본래 거래처에 얘기해 풀라고 돌려보낸다. 남의 손님 뺏지 않는 게 상도의라 생각하며 나만의 철칙이다. 투명한 거래와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과 함께 매출을 신장시켜 왔다. 주 거래처는 서울시청, 농협하나로, 동네 중소형 마트, 식자재 상인 등으로 한번 거래하신 분들은 이탈하지 않고 계속 거래하신다.
-생선 도매상이 아이티(IT)라니, 뜬금없는데.
남을 이롭게 한다는 뜻의 ‘이타(利他)’와 IT가 함축된 의미에서 이타넷이 탄생했다.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유통인의 애환을 풀어보고자 시작했다.
가락시장만 해도 3400명의 도매상과 수 천명의 직원들이 판매와 매출관리를 일일이 수기로 한다. 이를 경리직원이 재입력하고 재고를 맞춘 다음에야 낮 12시 지친 몸으로 퇴근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타넷’은 휴대용 포스 및 회계 통합 프로그램이다. 태블릿PC와 사무실PC 간에 자료가 실시간 연동되며 휴대용 프린터로 무선 출력이 가능하다. 남을 이롭게 한다는 ‘이타(利他)’이자 IT 이고, 로고에 노트북을 치는 노동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타넷의 장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첫 번째로, 판매와 동시에 매출 입력이 끝난다. 손으로 쓰지 않기 때문에 오류가 나지 않아 고객과 신뢰가 쌓이고 매출과 동시에 재고에 실시간 반영돼 초과 판매 오류가 방지된다. 그외 발주기능, 문자, 팩스기능 등 다양한 기능이 탑재되어 있으며 월매출 자동합산 및 계산서 일괄 발행 등 편리한 점이 매우 많다
특히 영업통계의 신뢰도는 이타넷만의 통계방법을 이용해 가격의 등락폭이 많은 이 업계에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보다도 앞선 가장 큰 장점은 현장 판매 직원들의 퇴근시간을 최소 2시간 이상 앞당긴다는 점이다. 수산 쪽은 밤 7시에 출근해서 다음날 오후 1~2시까지 일하는 분도 있다. 채소 쪽도 밤 8시에 출근해 다음날 11~12시까지 일하는 게 다반사고 재고 맞추려면 2~3시까지도 한다. 그래서 이타넷의 유니폼엔 '집에 언제 가지?'라는 카피가 붙어 있다.
지난해 추석 즈음에 청과 쪽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자기들은 재고도 안 맞고 직원들도 지쳐서 난리라고 하더라. 요즘엔 저녁 8~9시에 가보면 불이 꺼져있다. 집에 들어가 잠잘 시간도 부족한 사람들에게 여가 시간을 준 것, 그게 가장 큰 변화다.
-개발 동기는.
어려운 상황들을 이겨내고 옆을 돌아보니 아이들이 성장해 있더라. 나는 밤새 일만 하느라 아이들을 보지 못했다. 내가 나올 때는 자고 있고 들어오면 없으니. 아내에게도 미안했고 내 삶도 허망하게 느껴졌다. 나를 믿고 따라오는 많은 직원들, 그들의 삶도 그러지 않겠나.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여유를 줘보도록 뭔가 개선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시스템을 바꿔보자, 현장에서 종이전표가 아닌 IT를 접목해 매출을 잡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무실 업무가 한번에 끝나게끔 바꿔보자.
이타넷의 출발이 그렇게 시작됐다. 6년 동안 투자비만 10억이 넘고 시행착오도 6~7번 겪었다. 세상에 없는 물건을 꺼내야 하니 사건사고가 많아 포기할 상황이 100번은 넘게 찾아왔다.
-고생한 만큼 보람이 크겠다.
2020년 8월경 영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낮 12시까지 늘 있었던 현장 직원들이 이제 빠르면 8시에 퇴근한다. 사무실도 차 마시며 여유있게 일한다. 초기의 생각이 실제 일어나는 걸 확인하는 중이다.
나처럼 새벽이슬 맞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두 시간은 줬다고 장담한다. 이타넷은 손가락으로 찍어 입력하니 몸이 불편해 글씨 쓸 수 없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젊었을 때 꿈꾸던 취미생활을 찾게 됐다는 감동적인 말들을 한다.
강서시장은 붐이 일었다. 가입자 수가 계속 늘고 있고 올해 지나면 사용자가 꽤 될 것 같다. 시장도매인들이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른 것 같다. 앞으로는 이타넷을 통한 공유 플랫폼을 만들려고 한다. 단순한 회계 프로그램이 아닌 농수산물 도.소매 플랫폼으로 진화시킬 생각이다. 이 목표를 위해 처음 리어카를 끌었던 마음과 각오로 일하고 있다.
도.소매 유통 플랫폼에 소비자의 니즈를 담아내 많은 사람이 행복해 지는 IT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
이타넷이 아이티 기업으로 크게 성장한다 해도 대기업이 하는 것처럼 지금의 유통구조를 흔들고 싶지 않다. 중간 도.소매 상인들도 분명히 자기 역할이 있다. 이들의 역할을 극대화하는 일을 하겠다. 사업이 성공하면 이 분들에게 돌려줄 부분도 고민해 보겠다. 도.소매 상인들에게 어떤 걸 돌려줄지 구체적으로 내놓을 순 없지만 분명히 생길 것 같다.
지금 도매시장은 유통구조의 변화를 위해 격동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계절이 바뀌었는데, 봄이 온 걸 알면서도 겨울 옷을 고집하는 세력이 있다. 하지만 가락시장 시설 현대화와 함께 유통구조도 다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상인에게는 유통구조의 개선과 함께 가장 시급한 것이 시스템의 현대화다. 20년 전 시스템을 현대화하기 위해 이타넷은 밤새워 일할 것이다.
유은영 you@newsfar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