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앞에 선 심정"...민간RPC들 경영한계 봉착
"저수지 앞에 선 심정"...민간RPC들 경영한계 봉착
  •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
  • 승인 2022.01.0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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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전북도당 농어민위원회와 정책간담회 개최
생산자‧소비자 중심 ‘이중곡가제’로 적자누적 타개방안 모색

"대출기한 12개월로 복원하고 의무매입액 120%로 줄여달라

그게 안 되면 ‘폐업보상‧농협 흡수통합’으로 퇴로 열어달라"

벼값 비싸고 쌀값은 낮은 구조에서 이윤 남길 수 없어

"저수지 앞에 신발 벗어놓고 서 있는 심정이다"

30년 전 128개에서 반토막 난지 오래…정부 전폭적 지원책 마련을

 

(한국농업신문=유은영 기자) “저수지 앞에서 신발 벗어놓고 서 있는 심정이다. 제발 누가 나 좀 밀어줬으면 좋겠다. 그간 해 놓은 것도 있고 남은 사람들 생각하면 쉽게 뛰어들 수도 없으니….”

지난 12월 29일 전북 김제의 ㈜새만금농산농업회사법인 회의실에서 민간RPC 운영업주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날 ‘지속가능한 쌀 산업 발전을 위한 현장 정책 간담회’가 (사)한국RPC협회 전라지회(회장 박종대) 주최, 더불어민주당 전라북도당 농어민위원회(위원장 김상민) 주관으로 진행됐다.

‘지속가능한 쌀 산업 발전을 위한 현장 정책 간담회’가 지난 12월 29일 전북 김제 새만금농산농업회사법인에서 (사)한국RPC협회 전라지회(회장 박종대) 주최, 더불어민주당 전라북도당 농어민위원회(위원장 김상민) 주관으로 진행됐다.
‘지속가능한 쌀 산업 발전을 위한 현장 정책 간담회’가 지난 12월 29일 전북 김제 새만금농산농업회사법인에서 (사)한국RPC협회 전라지회(회장 박종대) 주최, 더불어민주당 전라북도당 농어민위원회(위원장 김상민) 주관으로 진행됐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민간RPC(미곡종합처리장) 업주들은 적자를 떠안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쌀산업 구조로 인해 더 이상 경영을 이어갈 수 없을만큼 한계에 내몰린 상황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지정토론 패널로 참여한 이익재 새만금농산 대표는 “소비자는 싸게 먹어야 하고 생산자는 비싸게 팔아야 하니 중간에 끼어 있는 우리 RPC들은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며 “지난해 정부양곡 공매가 있었지만 쌀값은 떨어져도 벼값은 안 떨어진다. 민간RPC는 벼값보다 싸게 쌀로 팔아야 하니 적자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가 민간RPC 1호인데 33년간 이런 환경에서 버텨왔다”며 RPC 활로를 열어주길 요청했다.

토론은 김상민 더불어민주당 전북도당 농어민위원회 위원장을 좌장으로 이익재 새만금농산 대표, 김왕배 이택라이스센터 대표, 권형진 더불어민주당 전북도당 농어민위원회 부위원장, 서용류 (사)한국RPC협회 전무가 참여했다.

이날 간담회는 생산비 증가와 지속적인 소비감소로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 쌀산업을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킬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열렸다. 특히 수확기 홍수출하되는 농가 벼를 매입해 산지쌀값을 지지하고 고품질쌀 도정으로 국내 쌀산업 위상 강화에 적잖이 기여한 산지 쌀 유통의 구심체 미곡종합처리장(RPC)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자리였다.

RPC는 1991년 도입한 제도로 농촌에 있는 방앗간을 정부 정책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벼 수확 후 건조‧저장‧가공‧판매를 일괄처리함으로써 농가 비용 및 일손 경감 효과가 크다. 지난 2005년 추곡수매제 폐지 이후 정부가 하던 벼 수매와 보관을 대신하고 벼값이 쌀값보다 비싼 ‘이중곡가제’ 속에서 각종 비용 부담과 손실을 떠안아왔다. 약 30년 동안 수매벼 보관 및 도정시설 현대화를 위한 투자는 늘리는 반면 마진을 챙길 수 없는 제도로 인해 적자가 누적됐으며 최근에는 원료곡 확보도 어려워 한계에 몰린 상황이다.

이익재 (주)새만금농산 대표
이익재 (주)새만금농산 대표

자동시장격리제로 원료확보 어려움 가중…농협과 대비

RPC는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농가 벼 매입자금 지원을 받는 것으로 일반 방앗간과 구분되며 민간이 운영하는 RPC는 농협RPC와는 처지가 달라 양곡관리법상 공익직불제와 함께 도입된 쌀 자동시장격리제와 정부의 쌀 감산정책 등에 대해 농협과 많은 견해차를 보인다.

박종대 (사)한국RPC협회 전라지회 회장(한결영농 대표)은 인사말에서 “민간RPC는 쌀 판매 부진에 따른 손실로 매년 사업의 지속을 고민할 정도로 힘들다”며 “향후 자동시장격리제가 고정체제로 가면 원료확보의 어려움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확기에 1년 쓸 벼를 한가득 사 놓는 농협과 달리 빈약한 자금 여력 때문에 3~4개월 쓸 물량을 사놨다가 이후부터는 주로 농협에서 벼를 사야 하는 민간RPC로선 자동시장격리로 벼 물량이 빠져 벼값이 인상되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다. 쌀값이 그만큼 오르면 되겠지만 풍부한 벼를 보유한 농협과 경쟁하는 한편 마트 등 거래처의 인하압박 때문에 쌀값이 벼값보다 낮은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때문에 벼값 인상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시장격리제의 고정화 움직임은 누적적자로 경영한계에 부딪힌 민간RPC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이익재 대표는 “민간RPC 1호로 33년 동안 이 사업을 영위해 왔다”며 “흉년 들어 쌀값이 높으면 정부양곡 풀어 쌀값을 내리고 풍년 들면 벼가 많은 농협에서 투매를 해 또 쌀값이 내려가 원가도 못건지는 역마진 상황에서 계속 출하하는 악순환을 반복해 왔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타개할 길이 안 보인다. 이제 힘에 부쳐 조만간 이 업을 접을려고 한다”고 토로했다.

민간RPC 업주들 “폐업 길 열어 달라” 호소

생산자와 소비자를 보호하느라 중간에 낀 RPC가 샌드위치가 된 상황, 거기다 농협에서 벼를 사는 민간RPC는 원료확보의 어려움까지 안고 있다.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RPC가 받는 벼 매입자금 지원에 있다. 농식품부는 수십억원씩 지원한다는 이유로 각종 규제를 만들 뿐 업계의 목소리엔 좀처럼 귀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이전에 1년마다 하던 경영평가를 ‘쌀산업기여도평가’로 바꿔 십여개에 불과했던 평가항목을 45개로 대폭 늘렸다.

그러나 정부 벼 매입자금 지원은 빌려주는 것으로 RPC가 은행에 담보나 신용보증을 하고 대출받는다. 때문에 농식품부에서 책정해 준 빌려쓸 수 있는 한도액을 다 못 갖다 쓰는 RPC들이 대부분이다.

한 RPC 업주는 “그 돈 우리가 다 썼나, 담보 대고 이자 내고 보증료 내고 대출받아 나락 사주느라 골병 들었다. 이젠 문 닫는 일밖에 안 남았는데 믿을 건 정부 정책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30년 전 128개로 시작한 민간RPC는 반토막이 난지 오래다. 이날 업계는 도저히 RPC 사업을 영위할 수 없다며 ▲정부의 폐업 지원 또는 ▲농협이 합병 인수하게끔 지원책 마련을 요청했다. 계속 운영을 원한다면 정부 지원자금을 다 쓸 수 있도록 담보 등 은행 대출 조건을 완화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김왕배 이택라이스센터 대표
김왕배 이택라이스센터 대표

농신보 보증요율 생산자 기준으로 조정해야

김왕배 이택라이스센터 대표는 정부지원 정책이 통합RPC 쪽으로 집중돼 민간은 홀대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과거 정권에선 건조저장시설이나 노후시설 개보수 자금 지원을 농협에 8을 주면 민간도 4 정도는 줬다”며 “지금은 민간RPC들은 지원요건을 맞추기 어려워 신청해도 선정되기 어렵다. 사실상 제외된 거나 마찬가지다. 고품질쌀 생산을 위한 시설현대화 지원도 못 받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쌀산업기여도평가 결과에 따라 주는 벼 매입자금 지원이 농협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농협은 농식품부뿐 아니라 중앙회에서도 지원금을 받아 벼 매입여력이 민간에 비할 수 없는데 쌀산업기여도평가는 민간과 똑같은 항목으로 받아 매입실적 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김 대표는 “농협은 마트도 있고 은행도 있으니 RPC 적자를 메울 수 있지 않나, 민간은 쌀 장사 하나로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수익구조 다변화시켜 주든지 기여도 평가를 폐지해 규제를 줄여주든지, 또 10개월로 단축한 대출기한을 12개월로 복원시켜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아울러 “RPC는 생산자가 아닌 가공업자로 봐서 농신보 보증요율이 높다. 생산자 기준으로 조정해 달라”고 말했다.

권형진 더불어민주당 전북도당 농어민위원회 부위원장
권형진 더불어민주당 전북도당 농어민위원회 부위원장

의무매입액 120%로, 대출기한 1년으로 복원을 

권형진 더불어민주당 농어민위원회 부위원장은 지금은 농산물 유통사업을 운영하고 있지만 과거 RPC에 근무한 이력이 있다. 그는 “민간RPC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오늘날 유통업을 운영하고 있다”며 “쌀 소비는 점차 줄어들고 쌀 대체식품이 많아져 RPC들이 힘들어질 거란 걸 당시에도 예견했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 변화가 없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결국 민간RPC가 도정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어 가공식품 쪽으로 모색을 해야 한다”며 “코로나 속에서 민간RPC가 운영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자체와 정부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용류 (사)한국RPC협회 전무
서용류 (사)한국RPC협회 전무

(사)한국RPC협회 측에선 정부의 개선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서용류 전무는 RPC 사업의 안정적 경영 확보를 위한 정책적 지원으로 ▲저금리 시대에 맞는 벼 매입자금의 금리인하 및 매입자금 대출기한 1년으로 복원 ▲계약재배 자금의 무이자 지원 ▲시장자동격리제 시행 대신 공공비축 산물벼의 RPC 인수도 우선적 보장으로 안정적 원료곡 확보 보장 ▲RPC 자체 가공을 통해 쌀로 인수해 가도록 정부 산물벼 인수 방식의 개선 ▲RPC와 임도정업체에 정부양곡 가공 문호 개방으로 수익구조 다변화 등을 요구했다.

특히 벼 매입자금 수확기 의무매입액을 150%에서 120%로 완화 또는 수확기 매입을 연간매입으로 개선해 연중 출하로 방식을 바꾼 농가의 출하 패턴에 맞게 RPC 매입방식도 변화시켜 달라고 했다. 이와 함께 RPC 시설자금 지원조건 상향조정과 시설개보수 사업 신설로 RPC 사업이 안정적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요청했다.

서 전무는 “RPC는 공공비축미 포함 수확기 쌀 생산량의 60% 이상을 수매하고 있고 수확기 수매가격 결정에서 역할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며 “이러한 정책적 지원이 따라야 RPC 사업이 지속될 수 있고 농가 벼 매입도 지속될 수 있다. 농가소득 증대와 쌀값 안정이 이뤄지도록 RPC 경영안정 지원에 힘써 달라”고 강조했다.

김상민 더불어민주당 전북도당 농어민위원회 위원장
김상민 더불어민주당 전북도당 농어민위원회 위원장

RPC가 보유한 문화적 가치 이어나가야

좌장인 김상민 더불어민주당 전북도당 농어민위원회 위원장은 산지 쌀 유통의 심각성을 새롭게 인지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오죽하면 폐업을 생각하겠나. 폐업보상제, 농협 흡수통합제, 신용보증이나 담보대출 운용여건 확대 등 제안해 주신 의견들을 메모했다”며 “RPC의 역할이 상당한데 민간과 농협의 정책적 균형을 맞춰 갈 수 있도록 기반마련에 힘써 보겠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 당국과 소통이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유통이란 건 전문성이 있어야 하고 민간RPC가 갖고 있는 문화적 가치와 지역농민들과 어우러져 쌀산업을 이어온 역사적 흐름을 본다면 쌀 체험 공간이나 쌀카페 등 공간들을 지자체들이 나서서 적극 지원해주고 도정에서 적자 나면 다른 쪽에서 메우게끔 여유를 줘 문화적 가치를 보존해 갈 수 있도록 패러다임을 만들자”고 독려했다.

유은영 기자 you@newsfarm.co.kr